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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뇌종양 사형선고 환자가 이틀만에 벌떡
작성자 희상주의 (ip:)
  • 작성일 2007-06-07 11: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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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 사형선고 환자가 이틀 만에 벌떡?!
 
[현직 판사가 쓰는 민중의술] 민중의술의 유형별 치료사례 <2>
 
황종국 울산지법 부장판사 
 
 
 ▲황종국 울산지법 부장판사

울산지방법원 황종국 부장판사는 현직 판사이면서도 민중의술 살리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그는 유명한 민중의술을 시술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민중의술을 시술하다 혹연 문제가 되어 사법적 판단을 필요로할 때는
관대한 처벌로 민중의술을 지켜주는 역할도 담당해왔다.


그는 "나는 12년간 병원을 다니며 앓던 콧병을 너무도 간단한 쑥뜸으로 고친 후
지금까지 22년 동안 민중의술의 경이로운 치료능력을 수없이 경험하고 확인하였다.

 

전신이 마비되어 식물인간 상태인 67세의 할머니가 30일간의 단식을 통하여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고 전하면서 "말기 간경화증으로 절박한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긴 어느 분에게 쑥뜸을 하게 하여 서너 달만에 병원에서 검사결과가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기도 하였다. 중풍으로 한방병원에 열흘 넘게 입원하였으나 증세가 점점 악화되어가던 친형님을 퇴원시켜 30분간 침을 맞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관절과 근육을 다쳐 화장실 출입도 업혀서 하던 사람이 침을 세 번 맞고 거의 정상적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오른 팔이 올라가지 아니하여 수십 번 병원을 드나들었으나 효과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잠깐 만져 채 1분도 안되어 팔을 빙빙 돌리도록 만드는 것도 보았다. 이런 사례는 끝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현직 판사가 쓰는 민중의술" 시리즈에는 황종국 부장 판사가 직접 전국을 순례하거나, 기자처럼 직접 취재-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전통-민중의술의 기록이다. (편집자 주)

 

제1장.  민중의술의 유형별 치료사례

'의사가 아닌 일반 민간인들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의술'을 흔히 민간의술이라고 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일반 민중들 속에서 자생하여 발전하였고 시술방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민중의 건강을 돌보는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의술이었던 점에서 '민중의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민주적이고 통합적인 의미를 띄는 민중의술이라는 용어가 더 친근감이 있어 보여 앞으로 이 용어를 쓰고자 한다.

민중의술의 뛰어난 특장을 내가 직접·간접으로 체험하고 지켜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민중의술에 대하여 왜곡된 시각을 가진 모든 견해는 근본적으로 민중의술에 대한 체험과 이해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그 이해를 돕기 위하여 부분적으로는 비교적 소상하게 적는다.

그렇게 하더라도, 여기에 드는 치료사례들은 민중의술의 대해(大海)에서 포말과 같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민중의술의 다양한 영역과 치료효과를 모두 알리기 위해서는 방대한 조사와 정리 작업이 필요하다. 그 일을 하는 것은 원래 국가의 몫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일에 관심조차 없다

1. 단식

내가 민중의술을 처음 접한 것은 사법시험을 합격하던 해인 1982년 4월에 우연히 단식을 하게 되면서였다. 서울대학교 정문 앞, 관악파출소 맞은 편에 있는 연립주택에서, 간판도 없이 단식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김수웅(金秀雄) 선생님. 그 때는 제대로 몰랐으나, 뒤돌아보니 그분은 참으로 명의였고 예지자였다.

그 때 나와 같이 단식을 한 환자 중에 67세 된 할머니가 있었다. 전신이 마비되어 호스를 목에 꽂고 혀가 굳어 말도 못하는 채 식물인간처럼 병원에 누워있는 것을, 그 자식들의 간청으로 단식원에 옮겨 놓고 30일간 음식을 끊고 생수만 마시는 완전단식을 시키고 지압·부항·관장·찜질 등의 보조요법을 시술하여 30일만에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을 내가 직접 지켜보았다. 또 20대의 처녀가 천식으로 말을 거의 못하는 상태에서 단식원에 들어와 보름간의 단식으로 완전히 회복되는 것도 보았다.

선생님은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와 남미로 이민을 가려고 처음에 침술을 배웠다가 병 고쳐주는 재미에 빠져 다양한 의술을 익혀 여러 저명인사들의 난치병을 고쳐주기도 하였다는데, 자신의 경험으로는 단식이 가장 완전한 치료법이라고 하였다.

당뇨병에 만성간염·만성신부전증 등의 일곱 가지 합병증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장한빛 씨는 퇴원하면 3주 내에 죽는다며 퇴원을 만류하는 의사들에게 죽어도 병원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퇴원을 한 후 먼저 단식으로 몸을 추스르고 살아났다. 그 후 그는 십여 년간 전국을 떠돌면서 경향 각지에 숨어 지내며 죽어 가는 생명을 살려주고는 홀연히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도인·기인과 향토 명의들을 많이 만나 그들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병을 완치하고 의술의 이치를 터득하였다.

그 결과, 현대의학이 불치·난치·고질병으로 간주하고 있는 많은 질환들에 대한 현대의학적 접근방법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현대의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알리는 행위야말로 이 시대의 민중에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1999년 말에 이에 관한 3권의 저서를 출간하였는데, 그 제일성(第一聲)은 소위 현대의학이라는 서양의학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 초읍동에 있는 천룡사(天龍寺)라는 절의 주지 효종(曉鐘)스님은 19세 때인 1979년경에 부산대학교병원에서 골수암이라는 진단과 함께 15일 내지 3개월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받고는 그 길로 지리산으로 들어가 동굴 등에서 완전히 자연생활을 하면서 3년간 하루 5되의 물(산에서 나는 생수)과 큰 숟가락에 고봉으로 두 숟가락의 죽염만 먹고 완치한 체험을 필자에게 들려주었는데, 그렇게 해도 기진하지 않더라고 한다. 스님의 말씀으로는, 밀양의 어느 절에 있는 보살도 3년간 죽염과 물만 먹고 유방암을 고쳤다고 하였다.

전라도 광주에 사는 윤준호 씨는 24세 때 내시경 검사 결과 위암으로 위가 벌집같이 되어 낫기 힘들겠다는 진단을 받고 전남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지리산 청학동의 갱정유도회에 계신 어느 분으로부터 사주(四柱)에 토기(土氣)가 부족하니 산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듣고는 그분을 따라 삼랑진에 있는 거문산으로 들어가 물도 먹지 않고 10일간 단식을 하였는데, 항문으로 코 같은 고름이 많이 빠져 나왔고, 그 다음에는 연한 생 쑥을 즙을 내어 먹고 참솔잎을 썰어서 불린 콩과 같이 씹어 먹는 생식을 3개월 가량 하였더니 위암이 낫더라고 내게 전해 왔다.

뒤에 보게 될, 『밥따로 물따로 음양식사법』의 저자 이상문 선생님으로 하여금 '생명의 법'을 깨닫는 단서를 열어준 박도섭이라는 분의 체험담을 재미삼아 옮겨본다.

박씨는 6.25전쟁 때 철원전투에서 총알이 뒷머리를 스치는 바람에 뇌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갔다. 3일 후에 의식을 회복했으나 수족을 움직일 수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코에 연결된 한 가닥 호스가 그의 생명을 보존시키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그런 상태로 병원 침상에서 8년을 보낸 박씨는 결국 앉은뱅이 신세로 퇴원을 하였다. 그러나 병신이 된 것도 비참했던 데다 가뜩이나 어려운 집안 살림에 가족들한테 짐만 된다고 생각한 박씨는 굶어죽기로 하고 곡기와 물을 끊고 누워서 목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 지 13일째쯤 되었을 무렵, 육체는 엉망이 되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반짝이는 유리알처럼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런 상태가 되자 신기하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되려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십여 년 동안 석고처럼 단단하게 굳었던 다리가 그때부터 부드러워지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놀라움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씨는 두 손을 이용하여 바닥을 기어다니다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한 발 두 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매일 파고다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던 박씨는 그 공원에서 매일 영생을 설교하던 김영수라는 사람으로부터 어느 날, 하루에 저녁 한끼만 먹고 물은 밤에만 마시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대로 해 본 결과 과연 몸 상태가 매우 좋아졌다. 그래서 중간에 16일간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다시 단식을 한 것을 포함하여 약 100일간 그 방법을 실행하였더니 다리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김영수씨는 금년 95세의 나이로 지금도 경기도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계신데, 농사일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을 만큼 정정하시단다. 시력과 청력은 물론 정력도 이삼십 대 젊은이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물론 그 비결은 그가 성경 통독과 체험을 통해 얻은 식이요법에 있다. 지금도 4∼5일에 한 끼만 먹을 정도로 소식을 실천하고 있고 물도 될 수 있으면 밤에만 마시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몸이 건강할 때 혈액의 pH는 7.3∼7.5로 약알칼리성이다. 혈액이 산성화할수록 pH는 약해진다. 약알칼리성 혈액일 때는 병균이 번식하지 못하지만 pH가 7.0 이하의 산성으로 기울면 병균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게 된다. 몸을 본디의 정상 상태인 약알칼리성 체질로 바꾸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단식이다.  

2. 침술

파스퇴르유업 회장이자 민족사관고등학교 설립자로 유명한 최명재 씨가 2000년에 서귀포 롯데호텔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다가 욕탕 속의 뜨거운 물에 데어 전신에 2∼3도 화상을 입고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2억5천만원의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3차례에 걸친 피부이식수술에도 불구하고 화상의 후유증으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고생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조선일보, 2002년 11월 16일자, 35면). 최회장이 침술의 위력을 진작 알았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호텔 측도 그런 거액의 배상금을 지출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안타깝다.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는 방법은 구당(灸堂) 김남수 선생님이 1994년에 논문으로 발표한 것인데, 그 방법이 지극히 간단하여 침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도 누구든지 할 수 있고, 그 효과가 즉시 나타나며 완벽하다는 것이 경이로운 장점이다.

그 방법은 화상 입은 곳에 아무 데나 군데군데 침(요즘 흔히 쓰는 가느다란 호침)을 꽂아두면(침을 꽂아두는 것을 유침이라 한다) 된다. 경혈 자리를 몰라도 된다. 화상은 통증이 제일 괴로운데, 침을 꽂아 놓으면 우선 통증이 한 시간 이내에 없어진다. 그러면서 진물이 나지 않고, 시술 전에 진물이 났더라도 서서히 없어진다. 사흘 정도면 딱지가 앉고, 수일 내로 완전히 낫는데, 흉터가 전혀 남지 않는 것이 신묘하다.

구당 선생님은 아랫배와 양쪽 다리가 데어 음모가 다 빠질 정도의 4도 화상을 입은 여자 환자를 침으로 완치한 사례를 발표하였는데, 처음 침술원에 와서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두 사람에게 붙들린 채 침을 맞은 환자가 5분 후부터 몸부림이 가라앉기 시작하여 한 시간이 되니까 잠이 들었고,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는 하나도 아픈 기가 없다고 하면서 돌아간 후로 모두 아홉 번 침을 맞고는 완치되었다고 한다.

침으로 화상을 치료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특히 양의사들이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구당 선생님에게 침뜸을 배운 양의사들이 임상사례를 발표했는데, 어느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4도까지의 화상도 10일 이내에 완치되었고 3도까지는 전혀 흉터가 남지 않는 것을 환자 치료를 통하여 확인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자신이 침술을 배운 후 100명 이상의 화상환자를 침으로 치료하였는데 모두 완치되었다고 하며 검증이 달리 필요없다고 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유명 종합병원의 정형외과 의사는 침을 활용한 후 환자가 3배로 늘고 약을 처방하는 비중은 1/3로 줄었다고 한다.

나의 당질(堂姪)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20여년간 손을 심하게 떨고 살아왔다. 병원에서 파킨슨씨병이라고 진단을 받아 의사가 처방한 양약을 수개월 복용하는 등 이런 저런 방법을 써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못 보아 포기하고 있었다.

1999년에 한침(재래침)을 한다는 어느 30대 전반의 젊은이가 나를 찾아 왔다. 초면에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가 없어서 먼저 당신의 의술을 증명해 보라고 했더니 어떤 환자든지 불러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당질을 불러 치료를 받게 했다. 간단하게 진단을 해 보더니 간이 나빠서 오는 일종의 풍(간풍)이라고 하면서 간 질환이 없느냐고 물었다. 조카는 B형 간염을 오랜 동안 지니고 있었음을 실토했다.

한쪽 손과 팔에 몇 군데, 그것도 입은 옷 위로 한번씩 침을 찌르고 빼는데(한침은 굵고 길어서 효력이 강하여 보통 유침을 안하고 찌르고 바로 뺀다)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침자리도 정확히 찾아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침을 놓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침자리가 눈에 보인단다. 그러고는 간단한 생활 섭생법 세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 날 저녁부터 당장 처방대로 한 조카는 하루도 되지 않아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 젊은이는 그 자신이 20대에 디스크를 앓았는데 2년여 동안 누워서 고생하며 병원치료 등을 포함한 온갖 방법을 써보았으나 못 고치고 있다가 어느 아주머니에게서 한침을 한달 반 가량 맞고는 완치된 후 그 아주머니에게 한침을 배웠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는 그 젊은이에게서 치료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고, 그 젊은이도 한 푼의 치료비도 받지 않고 그로부터 10년 넘게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다. 진정한 의술이 어떤 것인지, 인술(仁術)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런 분들을 의료법의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함을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마산에 사는 어떤 분이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고 간다. 12년 전 직장에서 공을 차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유명하다는 척추전문병원에 갔다. 요추 4·5번이 많이 협착해져 디스크가 탈출되어 신경을 누르고 있으니 수술을 해야한다고 하였다. 수술에 대한 믿음이 없어 수술은 하지 않고 약 먹고 주사 맞고 견인 등의 물리치료만 꾸준히 받았다. 그러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두세 달 동안 꼬부랑 할머니처럼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유명하다는 병원, 한의원 등을 전전했다. 그러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6∼7년이 지났을 때쯤, 샤워를 하고 거울을 무심히 보았을 때 몸이 완전히 C자를 이루며 왼쪽으로 휘어져 있었고, 종아리는 오른쪽보다 왼쪽이 확연하게 가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웃사람으로부터 어느 시골에 침과 뜸으로 용하게 치료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혹시나 하고 찾아갔다.

첫날 2분 정도 치료를 받고 일주일 후 두 번째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C자로 휘어져 있던 몸이 반듯하게 되었고, 굽었던 허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왔다. 정말로 너무 신기했단다. 석 달 정도 치료를 받았는데 90% 정도 치유가 되어 활기찬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분은 내게 묻는다. 양의사·한의사들에게 10년 이상 치료받아도 별 차도가 없던 요통(디스크탈출증)을 석 달 정도의 치료로 거의 완쾌시켰으니 과연 어느 쪽이 참 의사냐고. 오히려 한의사들이 침뜸을 배우려고 그곳에 오는 것을 많이 보았단다.

그 후로는 민간의술을 용하게 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다닌단다. 산골에 사는 어느 할머니도 그래서 만나게 되었다. 아주 어릴 적에 할아버지에게 직접 배웠다는 침술을 하고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증 환자였다. 대침으로 머리부터 몸 팔 다리를 쿡쿡 찔러 내려오다가 복숭아뼈 바로 위를 찌르니 검은 피가 펑펑 나왔는데, 그곳에 쑥뜸을 떠 주더란다.         

청주대학교 법과대학의 유재형(柳在馨) 교수는 운동을 하다가 엄지와 검지에 마비가 와서 3개월여 양·한방을 전전하다가 못 고치고 용하다는 침구인에게 가서 침을 세 번 맞고 완치된 후, 침·뜸·사혈(瀉血)요법 등을 배웠는데 그 후로는 본인과 가족들이 치료를 위하여 병원에 가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한 가정에 이러한 의술을 익힌 사람이 1명만 있으면 의료비와 환자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서울로 오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 한 일본인 승객이 안색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동반한 여자는 울고불고 승무원들은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것을, 마침 그 비행기에 동승해 오던, 내가 잘 아는 후배가 조금 배운 수지침과 수지뜸으로 간단하게 고쳐준 일화가 있다. 침술의 단순하면서도 다양하고 뛰어난 효과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에 지켜 본 사례 하나. 가까운 지인 한 분이 가게 개업일을 며칠 앞두고 의자에 올라서서 내부 장식일을 하다가 의자가 쓰러지는 바람에 옆으로 넘어졌다. 의식을 잃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고관절 근육 인대를 다쳤단다. 병원의 치료법으로는 몇 개월 꼼짝없이 입원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개업일이 코앞에 다가와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곧바로 침술로 유명한 한의사에게 가서 침을 맞고 왔다. 그러나 극심한 통증 때문에 눕고 앉고 일어서는 일체의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쑥뜸을 하여 다소 효과는 보았으나 기동이 심히 어려워 업혀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가게 공사일을 같이 하던 사람이 보기에 안타까웠는지 침을 잘 놓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한번 시술을 받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2번 시술에 목발을 짚고 스스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3번 시술을 받고는 목발 없이 걸어다녔다. 4번 정도 시술을 받고는 뛰어 다녔다. 기적이 아니면 천우신조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당연히, 침을 놓아준 그 분은 한의사도 침구사도 아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아다녀 잘 만날 수도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민중의술의 비애를 곱씹게 하는 참으로 서글픈 사연이 있었다. 편의상 그 분을 K라고 하자.

K는 다섯 살 때에(지금부터 근 45년 전이다) 부산 초량동에 있는 소림사라는 절에 갔다가 「차우(茶)」라는 중국인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당시 81세로서, 중국 소림사에 계시다가 중국이 공산화되는 바람에 자유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이주하신 분이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의 숨소리만 들어도 병을 알 정도였다고 한다.

스님은 처음 보는 K에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하셨다(두 사람은 전생에 도반이었는데, 스님은 첫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차우 스님은 K에게 중국무술과 함께 중국에서 스님들에게만 비전되어 오는 침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5살 때 급성 맹장염을 앓는 여동생에게 침을 놓아 고쳐준 것이 침술로 병을 고치기 시작한 첫 사례였다. 27세까지 22년간 무술을 익혀 고수가 되었다. 거기다 25,6세 때 동의보감 원전을 소장하고 있다는 어느 '거지교수'에게서 한국침을 1년 정도 배웠는데,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30대에는 대만에 체류하면서 그곳에 온 일본 오오사카 어느 양의 병원의 원장을 만나, 일본 침술에 능통한 그 사람과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의술을 교류하여 일본침에도 능숙하게 되었다. 한·중·일의 침법을 장점만 취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본인의 집요한 노력과 기도가 뒤따랐다.

침만 쓰는 것이 아니라 쑥뜸도 하고 부항도 한다. 웬만한 병은 만져서 고치기도 한다. 약초에 대하여도 스승으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 대가가 되었다. 산삼이 50여종이 된다는 사실과 산삼은 이파리부터 시작하여 뿌리까지 씹어먹는 것이 제대로 먹는 것임을 J로부터 처음 들었다.

그는 환자가 처음 방에 들어오면 그 걸음걸이로써 어디에 어떤 병이 있는지 알아내어 버린단다. 정신을 집중하면 환자가 어떤 경위로 언제부터 어떤 병을 앓게 되었으며 지금 상태가 어떤지도 알아낸단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타인을 통해서 환자의 상태에 대하여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 있단다. 그러니 환자의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치료를 하기도 한다.

어느 대학교 국악과에 재직하고 계신 교수님이 30여년간 중이염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고쳐달라고 내가 전화를 하였더니 대뜸 하는 말이, "그건 중이염이 아닙니다"였다. 사람도 보지 않고 병력도 들어보지 않고 바로 그런 말이 튀어나오길래, "그럼 무슨 병입니까" 하였더니, "피리를 불 때 무리를 해서 힘을 주는 바람에 생긴 증상인데 꼭 중이염 같은 현상이 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원래 환자의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아니하고, 즉 아무런 가시적인 작용도 가하지 아니하고 바로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가 20대 후반일 때, 병명도 모른 채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처녀가 사람들에게 들려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누워있는 그 처녀를 쳐다보고는 일어나서 걸으라고 하였다. 처녀는 어리둥절하였다.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걸으라고 하였더니 어리둥절해 하다가 걸었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서 처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 뒤 처녀는 결혼을 하였고 아들을 나았다. 그 아들이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다.   

그런데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 병을 고치자 사람들이 도대체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맥도 하고 침도 놓는 시늉을 하게 되었다. 이 분은 '도로써 병 고치는 법'에서 보게될 의신(醫神)에 해당된다. 침 자리를 찾는 데도 주저함이 없어 물어보았더니, 침 놓을 자리에는 손가락을 대면 엄지와 검지에 감각이 둔해지는 마비 비슷한 반응이 온단다.

그는 양의사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서울에서 손꼽는 병원 신경외과 의사의 어머니를 고쳐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뇌혈관이 터져서 의식이 마비된 상태에서 수술을 받고 6일만에 깨어난 후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되어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그 어머니에게 침을 세 번 놓고 걸어다니게 만들었다.

부산의 어느 대학병원 임상병리학과 주임교수의 어머니는 파킨슨병과 만성 디스크를 앓고 있는 72세의 노인이었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을 침을 한번 놓아 즉석에서 걷고 대화가 가능하도록 하여주었다. 그 의사 본인은 목 디스크를 앓고 있었는데, 일주일만에 완치시켜 주었다.

부산의 유명 병원에 입원해 있던, 뇌종양으로 3일밖에 못산다는 환자를 침도 안 쓰고 손으로만 만져서 2일만에 산소호흡기를 떼게 하고, 대화를 자유롭게 하고 걸어다닐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100여 일을 더 살게 하였다. 간암으로 1주일밖에 못산다고 선고받은 환자는 그의 치료를 받고 4개월째(2004년 6월 현재) 살아있다. 그는 일곱 명의 의과대학 교수를 고쳐주었다.

그는 유명한 의과대학의 신경외과 교수들을 모아놓고 똑 같은 증세로 걷지 못하는 환자 3명을 눕혀놓은 채 그 의사들에게 환자의 발가락을 움직이게 해보라고 하였다. 발가락이 두개만 움직이면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아무도 해내지 못하는 것을 그는 장침을 찔러서 그 자리에서 발가락이 움직이고 걷게 하였다. 잘난 양의사들의 말씀, "눈으로 직접 보니 안 믿을 수는 없고, 원리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다나. 환자에게, 낫는 것이 중요한가,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가 주섬주섬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오른팔의 삼중혈(손목에서 위로 5㎝ 정도 되는, 맥이 뛰는 자리) 자리와 그로부터 1㎝씩 아래로 두 군데에 만년필 꼭지머리 크기의 쑥뜸을 위로부터 1회씩 3회 반복하면 정신병이 치료되고, 기침은 오른팔 삼중혈에 볼펜 머리 크기로 한번만 뜨면 된다는 신기한 내용도 들어있다. 하여 그는 신의(神醫)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는 돈 한푼 받지 않는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면 소문이 너무 빨리 퍼져 금방 환자들이 몰려든다. 하루는 270명의 환자를 치료해주기도 하였단다.

내가 그에게 그의 빛나는 의술을 책으로 펴내어 널리 보급하고 계승시키자고 제의하였더니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의술이 하도 뛰어나니 한의대 교수 몇 명이 가르침을 청하였다. 3년 정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펴낼 생각으로 컴퓨터로 그의 의술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꼬박 7년이 걸려 완성된 내용을 디스켓에 담아 출판사 여직원을 불러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여직원이 사무실로 가던 도중에 날치기를 당하여 그 디스켓을 잃어버렸다.

어쩔 수 없어서 낙심해 있는데(디스켓 내용을 따로 복사해 두지 않은 것이 실수이지만) 몇 년 뒤 우연히 책방에 가보았더니 자신이 저술한 디스켓의 내용을 자신에게서 배운 3명의 한의대 교수가 각자의 이름으로 나누어서 따로따로 책을 출간했더란다. 날치기를 교사한 주인공이 누군지 명백히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충격을 받아 그날 이후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단다.

그의 의술도 확인해볼 겸 중풍을 앓고 있는 나의 친형님과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는 형수의 치료를 부탁하였다. 70세인 형님은 그리 심하지 않은 중풍으로 과거 두어 번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이번(2004년 6월)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동의의료원에 입원하였다.

소식을 듣고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열흘쯤 지나서 전화가 왔다. 전에는 입원하면 조금씩 차도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점점 안 좋아진다면서 풀이 죽은 목소리로 구원을 요청하였다. 병원에 같이 가서 형님을 살펴본 K는 단번에 원인을 찾아내고는 퇴원하면 3일, 늦어도 5일 이내에 재발 없이 완치하겠다고 자신하였다. 퇴원을 주저하는 형님을 설득하여 퇴원케 한 다음날 K와 함께 형님 집으로 갔다.

형님은 방향신경이 고장났는지, 걸음을 걸으면 똑바로 가지 못하고 게걸음을 치듯이 한쪽으로 쏠려 걷다가 넘어지는 현상과 함께 머리가 아프고 산란한 증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30분 동안 침을 맞고 일어나 걸어보라고 하자 똑바로 걸었다. 머리 아프고 산란한 증상도 사라졌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있었다. K가 머리에 침을 놓으면서 머리를 어디에 강하게 부딪친 것 같은데 그런 적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형님은 그런 적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K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한데, 꼭 머리를 부딪친 느낌이 오는데"하고 있는데, 형님이 오랜 기억을 더듬어낸 듯 오래 전에 전봇대에 얼굴을 심하게 부딪쳐 뺨으로 선혈이 낭자하고 뺨의 감각이 마비되어 며칠간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하였다.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으니 한 30년쯤 되었단다.

K는 바로 그때 다친 충격이 머리 속으로 들어가 박혀 있다가 이제야 밖으로 나오면서 신경을 누르고 고통을 가져오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30여 년 전의 사건을 머리에 침을 꽂아보는 감각만으로 찾아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형님은 3일간 침을 맞은 후 입원 당시의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 단지 몸에 기운이 없는 것을 빼고.   

형수는 일시 정차한 상태에서 차 뒤를 다른 차에게 추돌 당하였는데, 차는 폐차를 할 정도로 부서졌지만 외상은 없는 상태에서 양병원을 거쳐 한방병원에 20여일 입원하여 침을 맞고 부항도 뜨고 있었으나, 어깨와 허리가 아프고 어지러우며 머리 속이 산란하여 고통스러운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몸을 만져보고 침을 놓아본 K는 신경 두 가닥이 오랫동안 눌려있어서 치료에 시간이 좀 걸리겠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형수가 10년 전에도 큰 추돌사고를 당한 바 있었는데, 그때 다친 것이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채 있는 상태를 K가 찾아낸 것이다. 두 번째 침을 맞은 지금 형수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K는 침만 잘 놓는 것이 아니라 약을 비롯한 의술 전반에 걸쳐 대단히 능통하다. 천부적인 소질과 감각을 타고났고, 그것을 어릴 때부터 발견하여 키워준 스승을 만났으며, 여기에 바른 마음으로 오로지 의술을 갈고 닦는 노력과 그 의술을 사심 없이 베푸는 자세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늘이 내려준 지혜안까지 겸비하였으니, 가히 당대를 대표할만한 의인(醫人)이자 기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가 이러한 의술로 자신의 아버지를 치료한 일화는 소설보다도 더 기막힌 일대 신기한 사건이다. 아버지는 부산대학교병원, 현대아산병원, 국립의료원 등지에서 모두 말기 폐암으로 진단 받고 6개월밖에 못산다는 선고까지 받았다. 즉시 거처를 부산에서  시골로 옮겼다. 전통 초가집을 개조하였다.

방바닥을 구들까지 파내고 황토를 새로 바르고 벽도 흙으로 새로 발랐다. 천정도 헐어내고 새로 단장하였다. 아궁이를 세 군데로 내었다. 방안에는 지장수를 담은 항아리 한 개만 놓았다. 아버지를 방안에 모시고 방문을 밖에서 모두 못질하였다. 세 군데 아궁이로 불을 지폈다. 방이 못 견딜 정도로 뜨거워졌다 싶으면 불을 죽였다가 조금 식으면 또 지피기를 며칠간 반복했다.

음식은 아무 것도 넣어주지 않았다. 밖에서 불러서 대답이 들리면 사정없이 불을 땠다. 불러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일주일 정도를 그렇게 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환자는 방안의 엄청난 열기 속에서 그 동안 지장수만 마시면서 견디다가 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뿜어내고 토해내고 쏟아낸 채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억지로 소금물을 한 잔 먹이고 소금물로 전신을 닦아낸다. 의식이 돌아오면 솔 숲 길을 산책시킨다. 그리고 기타 등등…. 그리하여 아버지는 완쾌되어 지금 19년째 살아 계시다. 경남 산청에서 넓은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이 치료법을 그는 경북 문경에 사는 어느 할머니에게서 배웠단다. 이 땅의 민중의술이 어떤 것인지, 그 실체의 일단을 전율이 일 정도로 치열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종합대학교 재단 이사장은 중풍이 왔는데, 재단 산하에 있는 한의과대학의 교수들과 의사들에게 치료를 맡겼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어느 재야 침구인을 소개받아 그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완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한의과대학의 교수와 의사들을 모아놓고 그 재야 침구인 더러 강의를 하라고 하였단다. 자존심이 상했을 교수와 의사들이 시큰둥 하는 바람에 강의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한다.  
hjkook2000@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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